한국성을 붙잡는 까닭과 방식

이종건 / <건축평단> 2015 겨울호

 

한국인이 한국성을 숙고하는 것은 인간에게 인간됨의 과제처럼 전혀 이상하지 않을 뿐더러, 마땅하기조차 하다. 우리가 무엇을 숙고할 수 없겠는가? 무엇을 논의할 수 없겠는가? 인간사를 둘러싼 어떤 사태가, 숙고와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없겠는가? 한국성이란 것은 그것이 지나치게 보편적이고 추상적이어서 다룰 만한 것이 아니라고, 아무리 다루어도 성과를 낼 수 없는 것이라고 여기거나 주장하는 사람은, 정작 문제가 숙고의 대상이 아니라 숙고(의 한계)에 있다는 점을 살피지 않는다. 문제는 사유(의 능력)다. 한국성 숙고의 가치나 타당성은 한국성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자리를 잡는 위치나 구도, 그리고 테두리 설정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오해부터 피하자. 한국성을 숙고하는 ‘지금여기’는 ‘그때거기’와 다르다. 한국성이라는 기표로써 우리건축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하는 의도나 의지가 ‘거의’ 없는 까닭에(정체성이란, 주체의 힘이 구성한 잠정적 통일 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는 까닭에), 그것을 보편적/집합적으로 혹은 환원적으로 규정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없다. 콤플렉스나 주체성 결핍에서 오는 강박, 그러니까 한국건축은 한국적이어야 한다는 내부의 존재론적 정언명령 또한 ‘거의’ 없다. 콤플렉스도 이제는 ‘거의’ 없다(여기서 ‘거의’는 절대성이 들어서지 못하도록 막는 부사다). 사태가 이러하다면 도대체 ‘지금여기’ 우리가 한국성으로써 붙잡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며, 그리하고자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리고 붙잡는 방식은 어떠해야 하는가?

그보다 우선, 왜 또 한국성인지 물을 것이다. 특히 유별난 이 ‘현상’은 세상 어디에서도 찾기 힘드니 말이다(건축의 영국성을 둘러싼 논의는 한 때는 심각했다). 그에 대한 답변은, 정확히 거꾸로 생각하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세상 어디에도 없다면, 바로 그 현상이야말로 지독히 한국적인 것이 아닐까? 한국성의 한 발현이 아닐까? 그 질문이 진실로 오직 ‘우리에게’ 거듭거듭 나타난다면, 그러한 특이성이야말로 우리 현대사와 맞물린 우리 고유의 삶의 현상이며, 바로 그러한 까닭에 그것을 긍정해야 할, 그래서 틈틈이 숙고해봐야 할 과제가 아닐까?

내가 한국성을 붙잡는 까닭은 대충 세 가지다. 1) ‘인간의 본질은 역사’라는 사르트르의 말을 굳이 원용치 않아도, 역사가 없는 납작한 삶은 인간의 삶이라 할 수 없다(역사교과서 국정화는 탈역사화 곧 반인간화에 다름 아니다). 비록 만족할만한, 아니 지극히 실망스럽다 해야 하겠지만, 오랜 기간 결코 적지 않은 선배들이 고투로 일군 것들(예컨대, 김인철의 <공간열기>는 소중한 지적 자산이다)은, 어떤 이유로든 단순히 방치할 일이 아니다. ‘지금여기’의 눈으로 살펴 재고할만한 것은 발굴하거나 반면교사의 구도로 그려내야 할 일이다. 2) 정치, 경제, 언어, 문화 그야말로 삶의 전 영역의 글로벌화가 가속되는, 그리하여 생명 환경의 차이들이 급격히 제거되는 단 하나의 자유 시장체제 상황은, 저항의 맥락에서든 조장의 책략에서든, 우리로 하여금 ‘지구적 특이성’ 혹은 ‘지역적 보편성’을 숙고할 수밖에 없도록 한다. 3) 역사에 보존된 문화유산과 대화함으로써 오늘의 삶을 살아갈 지혜를 모색하고 감각의 결을 늘려가는 것은, 생성의 길을 열어가는 ‘하나의’ 믿을만한 방법이다. 그리고 때때로 삶의 현장을 주의 깊게 살펴보며(그렇다. 한국성은 ‘지금여기’에도 반드시 서성이고 있다)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성찰하는 것은, 사유와 실천의 (유의미한) 지평을 여는 일이다.

그러므로 ‘지금여기’서 한국성을 붙잡는 방식은 ‘그때거기’와 달리 1) 구심적이라기보다 원심적이어야 한다. 윤곽을 그려내어 한정하기보다, 그래서 수렴에 의한 배제와 수용의 구도가 아니라, 모종의 씨앗을 발견해내어 발산하는 ‘다른 길 내기’ 곧 생성적이어야 한다. 명사가 아니라 동사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우선 모든 형태의 근본주의로부터 거리두기로서, 사태를 진리-허위의 구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한국성은 역사나 오늘의 삶의 현장에서 우리가 찾아내야 할 객관적 실재 혹은 문화적, 정신적 원본이 아니라, 역사 혹은 오늘의 삶의 현장(의 어떤 측면)을 해석해, 뭇 ‘살이’가 편안해할 삶의 형식을 그려보는 ‘하나의 생각’으로 간주하는 것이 옳다.

2) 그러한 까닭에, 역사와 사회의 어떤 한 부분(예컨대 조선시대든 고려시대든, 영정조든, 이황이든, 선비사상이든, 무속신앙이든)은 ‘말 그대로’ 오직 한 부분으로 볼 일이며(부분을 전체로 간주하는 것은, 결코 온당하지 않거니와 천만부당한 일이다. 논리적으로, 어떤 부분도 전체일 수 없다는 것은 명징한 사실이다), 그 가치는 우리의 역사나 사회 전체를 설명해내는 능력이 아니라, ‘지금여기’의 삶의 소용에 두어야 한다(지구화 시대에 접어든 ‘지금여기’는 한국이라는 개별국가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리해서 최소한 ‘지금여기’ 우리의 삶의 문제들, 그리고 가급적 그로부터 더 나아가 지구적 차원의 삶의 문제까지 끌어안을 수 있어야 한다.

3) 따라서 ‘한국성’을, 서양과 우리를 나누거나 대치시키는 다른 형태의 오리엔탈리즘(코리아니즘)이 아니라, 세계의 문제를 열어 새로운 삶의 방식을 개진해나가는, 보편적 휴머니즘(코스모폴리탄)의 ‘대안적 길’ 내기로 삼아야 한다. 한국성은 한국 언어로, 한국 개념으로, 한국 사상으로, 한 마디로 한국의 것으로 구성하고 제시해야 한다는 생각은, 그래서 이방적인 것 예컨대 서구적인 것을 써서는 안 된다고 하는 생각은, 마치 한국 음악은 궁상각치우로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만큼이나 우리 영역을 좁은 울타리로 한정한다. 순전히 한국적인 것으로 규정할 정도로 순정한 무엇이 우리에게 존재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지만, 설령 그러하고 그래서 그것을 발굴하는 데 성공한다손 치더라도, 결국 번역을 통해 그것을 보편의 층위로 옮겨야 할 과제가 기다린다.

이러한 생성 작업을 제대로 해내기 위해서는, 우선 엄밀하고 냉정한 ‘파괴 작업’이 필요하다. 생성에 방해되거나 거치적거리는 것들부터 치워내야 한다.

1) 다시 말하건대, 한국성의 원본이 어디엔가 존재한다는 관념, 그러니까 어디에 숨어있는 한국성을 찾아내야 한다는 관념을 없애야 한다. 한국성은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옛 건물들에도 없고, 옛 집짓기 방식에도 없으며, 한국 현대건축을 다 끌어 모아도 없고, 그리해서 거기에 공통적인 것을 찾아내어도 있을 수 없다. 한국성은 객관적으로 변하지 않는 상태로, 그러니까 사물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예컨대 문화유산) 혹은 사물들과 맞물린 생활세계(lebenswelt)와 창조적 개인 간의 대화로써 비롯되고, 예민한 감성과 출중한 안목을 지닌 자들의 감통으로 출현해서, 적확한 언어로 개념화 작업을 거침으로써 착근되는 것이다. 한 마디로, 통찰과 안목에 근거한 개인의 해석의 결과라는 것이다.

2) 한국성을, ‘넘겨받아 연속성을 만들어나간다’는 뜻의 ‘전통계승’으로 간주하는 순진한 관념을 없애야 한다. 전통의 가치는 그것이 삶을 갱신하는 능력에 있다. 역사가 그러하듯, 현재의 삶의 질문에 무력한 전통은 무가치하다. 따라서 전통은 ‘지금여기’의 삶을 북돋우고 지어가는, 따라서 보지(保持)가 아니라 파괴와 어김을 허락하는 변증적 생성의 테제일 수밖에 없다. 한국성 또한 그러한 역동성 곧 변화와 생성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옳다. 그러므로 ‘이미’ 붙잡은 한국성은, 그것이 끊임없는 자극과 영감을 주는 한 생명력을 지닌다는 것, 그러니까 그렇지 못할 때 죽은 것으로 치워 없애야 할 대상일 뿐이다. 한국성은 ‘불연속성의 연속성’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3) 우리는 한국 사람이니, 우리가 하는 건축은 한국적일 수밖에 없다는 막연한 생각을 버려야 한다. 서구중심주의가 우리 영혼이나 마음 깊숙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에 따라 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 모두 이미 서구화되었다. 대체로 서구식 삶을 산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의식적으로 생각하거나 행동하지 않으면 서구중심주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 진술은, 서구화나 서구중심주의가 문제라거나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서구화로부터 온전히 독립해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이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다만, 한국성 문제를 그렇게 ‘물 타기 방식’으로 흐리멍덩하게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4) 순혈주의를 버려야 한다. ‘한국인은 세계 유일의 단일민족’이라는 진술은 단순히 신화다. 순혈국가는 우리뿐 아니라 세상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특히 사상이나 문화는, 수천 년 전부터 서양과 동양이 혼융되어 왔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뿐 아니라 지구화 시대에서 모든 나라와 구별되는, 그러니까 우리나라만 갖고 있는 사상이나 문화를 찾아내는 것은, 그 자체가 지난하거나 불가능하지만, 설령 찾아낸들 그것이 세상의 머리와 가슴을 건드릴 힘이 없으면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 순정적인 것이든 혼융적인 것이든, 문제는 사유와 문화의 힘이다. 강도와 독창성이 핵심이다. 그 자체로 진실로 강도가 높고 독창적인 사유와 문화는, 그로써 거꾸로 한국성을 만들고 열어간다. 백남준과 이우환과 사물놀이와 싸이가 그러하다. 문화의 영역에는 원류 혹은 원조가 없다. 문화의 주권은 어딘가에 이미 있어온 무엇을 누가 제대로 꽃을 피웠느냐에 의해 주어질 뿐이다. 들뢰즈가 들뢰즈 고유의 언어로 고유의 사유를 펼쳤던가? 사유의 산봉우리를 형성한 거의 모든 철학자들이 다 그러하다. 문화의 영역도 마찬가지다. 혼융은 독창성을 개진하는 데 필수적이다. 순혈주의에 대한 고집이나 집착은 종국에는 자폐되어 고사(枯死)할 뿐이다. 진실로 창조적이기 위해서는, 이방 언어로 내 생각이나 감성을 표현하는 법을 익혀야 하고, 나의 언어로 내가 아닌 무엇을 말하는 법을 익혀야 한다.

5) 인습적 권위를 파괴해야 한다. 주지하다시피, 우리의 인습적 인식은 서구적인 것을 해명하거나 따져 물을 대상이 아니라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 진리로 삼는다. 예컨대 <추상과 감정이입(Abstraction and Empathy)>으로 일약 세계적 인물이 된 보링거는, 추상과 감정이입(나는 그 책의 번역서를 내면서 감정이입을 감통으로 고쳐 옮겨야 한다고 썼다)이라는 두 ‘근본적 미학충동’을 “우주를 향한 어떤 심령적 태도”라는 가설에 근거해 개진했다. 그리고 들뢰즈와 가타리는 신체를 스피노자의 에티카에 따라 정동(affect)으로 파악해, 동물, 소리, 마음이나 아이디어, 언어, 사회, 구름, 깃털, 무지개, 차, 정의, 거미-파리, 쥐 등까지 신체로 보아, 신체를 구성과 탈구성의 과정 곧 ‘되어감’에 있는 관계들의 축적으로 해명한다. 사례가 어디 그뿐이겠느냐마는, 그들이 동원하는 개념이 동양의학에서 널리 쓰는 ‘기(氣)’ 개념만큼이나 추상적이지만, 그것이 지닌 지식의 무게나 권위는 가히 ‘기’나 감응/감통 개념에 비할 바 아니다. 하이데거의 사방/사역(fourfold) 개념 또한 ‘천지인(天地人)’이나 ‘회삼귀일(會三歸一)’과 엇비슷하지만, 비교조차 이상하게 여긴다. 부지불식간에 내면에 자리 잡은 서구중심주의 혹은 사대주의 탓이라 생각한다.

6) 생성력이 없는 것은 한국성 숙고와 논의로부터 배제해야 한다. 우리 삶에 보편적인 것이나 지배적인 것일지언정 생성 가능성이 없다면, 한국성 숙고와 논의의 테이블에서 치워야 한다. 예컨대 우리 거주문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그러니 분명 한국적인 것이라고 해야 할 아파트에서 읽어내어 새롭게 작업해낼 것이 무엇이겠는가? 아파트를 치워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테이블에 가져올 때에는 그것을 읽어내는, 그로써 새롭게 해명할 수 있을 개념(틀) 또한 가져와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제시된 것들 앞에 반드시 물어야 할 것은 “그래서(so what)?”라는 질문인데, 이 질문에 답할 수 없는 것들은 우리의 정신을 어지럽히거나 에너지를 낭비할 뿐이다. 세상에는 군더더기가 너무 많고, 거기에 비해 삶이 너무 짧다.

한국성 숙고에 (탈)식민성의 문제를 외면하기 힘들다. 우리에게 그것은 정확히 ‘탈-서구’와 같은 말인데, 딱히 우리뿐 아니라, 동아시아 혹은 비서구 문화권에 속한 사람들 모두 한 때 해결해야 했던 절박한 아포리아로서, ‘지금여기’서도 검토해 봐야 할 과제다. 잘 알다시피 우리와 동아시아에게 근(현)대화는 곧 서구화이었듯, 삶의 거의 전 영역이 어느덧 서구화된 우리에게, 그러니까 주체적 근(현)대화를 이루어내지 못한 우리에게, 이 과제는 ‘지금여기’를 되돌아보게 하는 인식의 역(閾)인데, 이 역을 넘는 순간 우리 의식 앞에 몇 가지 문제가 나타난다.

1) 의식이 가장 깨어있는 앵커라 해도 별 이견이 없을 손석희 뉴스의 한 꼭지 ‘팩트 체크’가 보여주듯, 우리는 지금 타 언어의 번역의지를 거의 온전히 상실하고 있다. 어디 언어뿐이겠는가? 우리의 삶의 현장 곳곳에 타자의 것들이 빼곡하다. 정치며 경제며 사회며 문화며 종교까지, 그것들을 빼면 존립이 불가능할 정도다. 그렇다고 해서, 혹은 그러한 까닭에, 타자의 것들을 모조리 없애버려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 것 곧 삶의 주권의식이 ‘지금여기’ 너무 희박한 것은 분명히 큰 ‘문제’라는 것이다. 주권 혹은 주체의식은, 국가든 지역이든 개인이든, 삶의 진정성이라는 측면에서 마땅히 소중한데, ‘지금여기’ 우리의 삶은 애써 의식하지 않고는 의식조차 하기 힘든 지경이다. 언어든, 개념이든, 문화든, ‘번역 의지’와 번역 작업은 무조건 필요하고, 왕성할수록 좋다.

2) ‘서구-한국 대립구도’는 ‘지금여기’ 지양해야 옳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문학적 유산이 21세기 일본 문단 곳곳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일본 근대문학의 최고봉”이자 “국민 작가” 나쓰메 소세키(1867-1916)가, 백 년 전 정확히 그 구도를 취했다. 나쓰메는 여러 논설과 강연을 통해, 급격하고 피상적 근대화 결과로 일본인들이 서양의 (정신적) 예속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고 비판하며 ‘자기본위’ 사상을 주창했다. ‘자기본위’는, “서양 문명에 대한 수동적 입장에서 탈피하여, 서양을 상대화할 수 있는 능동적이면서 자립적인 사고”로서, 세계를 근본적으로 ‘서양-일본 이원론적 구도’로 파악하는 중체서용, 화혼양재, 동도서기의 판본이라 할 수 있는데, 윤상인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교수는 다음처럼 나쓰메의 생각에 동조한다. “언어나 문화적 토대가 다른 데다 역사적 경험을 달리하는 일본인이 왜 영국인들이 숭상하는 고전의 해석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반문은 정당하다.” 윤 교수는 “영문학 연구의 규범과 체계 속에 편입되는 것에 저항”하는 영문학 연구자의 태도가 정당하다는 것인데, 이것은 오직, “서양의 노예가 되는 공포를 공유했던 동아시아의 정신적 궤적을 ‘저항의 역사’로 포괄”할 때만 그러하다. 그러니까, 그러한 공포가 사라진, 사라졌을 뿐 아니라 세계를 복수의 문화들이 혼융되는 지구 공동체로 접근해야 할 ‘지금여기’의 삶의 상황에서는 ‘그때거기’와 달리 그러한 것이 정당하다 할 수 없다는 것이다.

3) 나쓰메는 서양문학으로써 서양문학을 극복하는 과업을 “피로 피를 씻는 것”으로 생각해, “자국어를 통한 창작을 통해 서양에 대한 정신적 자립의 돌파구를 마련”하려고 애썼는데, 후일 자기 스스로 “기형아의 송장”이라고 인정했듯, 소위 ‘물로 피를 씻는 길’로써 도달한 그의 영문학 연구는 실패했다. 피를 씻어낸 물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의 문학작품은 자신의 문학론과 달리, 이쪽과 저쪽을 대립구도로 놓기보다 그 둘을 함께 거머쥠으로써 상당한 수준의 문학적 성취를 이루어내었다는 것이다. 그는 서양 근대소설과 일본 전통문학의 “가파른 경계에 서서,” “서구로부터 수입한 ‘소설’에 에도 시대의 전통적 서사 양식(예를 들면, 라쿠고 등)을 가미”함으로써 새로운 세계를 열었는데, 이러한 성취는 “서양의 근대소설과 일본의 문학적 전통 사이의 완충 공간을 자신만의 표현 영역으로 만들”어, “온전한 의미에서 문학이라고도 문학이 아니라고도 규정할 수 없는 생소한 표현 세계를 즐기듯이 만들어 나갔”기 때문에 가능했다.

4) 그러므로 ‘지금여기’는, ‘서구-한국’ 대립구도 안에서 우리 것을 찾거나 만들어내어 서구를 넘어서고자 했던 ‘그때거기’와 달리, 그리고 근(현)대화를 서구화와 일치시켜 ‘서구 따라잡기’에 매진해왔던 ‘그때거기’와 달리, 정치와 경제와 문화와 여타 모든 것이 상호영향 속에 다중 간섭하는 ‘지구화 시대’(<건축 없는 국가, 2014, 개정판>에서 썼듯, 작금의 세계어는 글로벌 잉글리시 곧 글로비시다) 안에서 ‘한국성’을 접근하는 것이 옳다. ‘지금여기 한국성’은, 무엇보다도 글로벌리즘의 동일성에 저항하는 차이를 위한 전략으로, ‘대안적 행로’를 모색하고 ‘다른’ 길을 내어가는 사유와 감각의 힘으로 파악하는 것이 타당하다. 공간(空間)을 공간(共間)으로 바꾸어 쓰는 김인철의 번역의 힘은, 내부와 외부를 묶는 장소 곧 ‘함께하는(共) 사이(間)’를 거론하는 데 그쳐서는 무용(無用)하다. 그리 바꿈으로써 특별하거나 새로울 것이 새삼 없기 때문이다. 그로써 어떤 무엇이 끝나기도 하고 그로써 다른 무엇이 시작되는, 그리해서 이쪽과 저쪽에 동시에 속하는 경계라는 개념과 그리 다른 뜻을 펼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익히 아는 매개공간이나 과정공간이나 사이 등과도 그리 다르지 않다.

다소 중첩되는 진술들과 주장들로써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단적으로 이러하다. 1) ‘한국성’은 이제 ‘서구-한국 대립구도’뿐 아니라 집합적 정체성이나 순혈주의나 전통계승 등의 무거움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창조적 개인의 ‘가벼운 개념어’로 삼아야 마땅하다. 2) ‘한국성’은 ‘지금여기’의 삶 곧 글로컬리즘(glocalism)의 삶의 소용에 닿아야 마땅하다. 3) ‘한국성’은 그러한 소용에 닿을 뿐 아니라, 대안적 삶의 길을 내는 물꼬가 되어야 마땅하다. ‘한국성’으로써 개인이 창조해낸 개념어가 이러한 조건들을 충족시킬 때, 그것은 거꾸로 한국의 정체성이나 전통을 새롭게 조형할 것이다.

두세 달 전, 박근혜 대통령이 여름휴가 중 읽은 책들 중 공감을 느꼈다며 국무회의에서 <한국인만 모르는 다른 대한민국, 2013>이라는 책을 언급했다. 그리고서 단박 베스트셀러 순위에 오른, “하버드대 박사가 본 한국의 가능성”이라는 부제를 붙인 그 책은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한국이름, 이만열)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가 저자인데, 그는 거기서 한국을 “아시아에서 등장한 또 다른 1등 국가”로 내세우며 선진국의 일원이 되었지만 정체성이 흐릿하거나 없어 문제를 안고 있는 한국을 위해, 일본 ‘사무라이’처럼 “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 ‘개념’”으로 ‘선비 정신’을 내세울 것을 제안하며 다음처럼 썼다.

“선비 정신은 한국 사회와 역사에 깊숙이 뿌리 박혀 있다. 개인적 차원에서 선비 정신은 도덕적 삶과 학문적 성취에 대한 결연한 의지와 행동으로 나타난다. 사회적 차원에서는 수준 높은 공동체 의식을 유지하면서도 이질적 존재와 다양성을 존중하는 태도로 나타난다. 홍익인간으로 대표되는 민본주의 사상을 품고 있으며, 자연을 극복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조화를 이루려는 특성이 두드러진다. 국가적 차원에서는 외세 개입에 강력히 저항하면서 동시에 평화적 국제 질서를 적극 지지하는 태도로 나타난다. 이처럼 한국인뿐 아니라 전 인류가 동의하고 지지할 수 있는 보편적 가치가 선비 정신에 녹아 있다. (중략) 오늘날 지식인은 사회 전체에 대한 책임감을 잃고 폐쇄적인 개별 영역에서 한정된 전문가로 살아가는 세상이다. 이런 시대에 선비 정신은 절박하게 필요하다. 교육이 삶의 본질적 차원을 떠나 도구화되어버린 세상에서 선비 정신은 교육의 가치를 재발견하게끔 유도할 수 있다. 한국의 전통 교육을 발굴하고 복원한다면 외국으로 수출할 수 있는 훌륭한 상품이 될 것이다. 선비 정신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지행합일’은 전통을 발견하고 이 속에서 교육 체계를 다시 세우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리고 일본의 ‘구몬 학습법’ 같은 것과 경쟁할 만한 의미 있는 프로그램을 제공해줄 것이다. 만약 한국이 선비 정신을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의 요구에 맞게 수정하여 재창조할 수 있다면 엄청난 파급력이 발휘될 것이다. 예전 ‘사무라이’ 개념이 그랬듯 세계로 확산되어 지구인이 향유하는 문화 중 하나로 자리 잡을 수 있다. 그러면 한국은 단순히 소비품을 생산하는 차원을 넘어 사람이 사는 방식 자체에 영향을 끼치는 수준까지 발전한다. 이것이 진정으로 중심적인 역할이다. 더 나아가 세계인을 포용하는 역할까지 담당할 수 있다. 무절제한 소비가 지배하며 진통을 겪고 있는 이 시대에 한국이 제시하는 ‘선비 정신’은 치유와 회복의 처방이 되기에 충분하다. . . 선비와 같은 지도자야말로 전 세계 수십억 민초가 갈망해온 이상적이 모델이 아닌가?”(밑줄은 필자가 친 것이다.)

페스트라이쉬라는 한 개인이 주목해서 발굴/해석하는 ‘선비 정신’이라는 개념어가 ‘지금여기’ 지구적 삶에 크게 소용되고 가치 있는 ‘대안적 삶의 길’을 낼 수 있으리라는 제안은, 여기서 내가 붙잡는 ‘한국성’ 논지에 정확히 일치한다. 물론 선비 정신이 “현대 세계인에게 모범적인 인물상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라는 그의 주장은 속단할 일이 아니다. 누군들 그리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자기만의 고유한 정체성과 문화가 없다면 자신 있게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주장, 그리고 “과거의 재발견은 한국이 창조적 발전을 추구할 때 미래로 전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주장에, 나는 온전히 동의한다. 그리고 “한국이 홍익인간, 선비정신, 유교, 불교, 이런 깊은 사상과 철학을 버리고 뿌리 없이 표류하는 대중문화” 곧 “흥겹지만 표피적”이라는 느낌을 주는 “케이팝 같은 한류문화”만 “좇다가는 만주족처럼 될 수 있다.”는 주장 또한 크게 공감한다.

나는 작년 도코모모 예비 발표에서 민현식의 건축을 ‘맑음의 건축’으로 이론적으로 개진할 의향을 밝혔는데, 이 또한 선비 정신에 기초한 생각이지만 ‘맑음’이 더 건축적이리라 판단해서 선비 정신보다 ‘맑음’을 개념어로 잡았다. 그리고 <건축 없는 국가, 2013>에서 김효만의 건축을 몽유도원도에서 착상해 ‘유(遊)의 공간’으로, 조민석의 건축을 한국 고유의 불교 사상 ‘화쟁’으로 풀이한 바 있는데, 이러한 시도는 정확히 페스트라이쉬와 같은 생각에서다. 그리고 얼마 전 행한 오픈아키텍처스쿨 강의에서 한국적 건축공간을 ‘목(木)의 공간’으로 개념화하고자 했다. ‘한국성’을 붙잡을 때 ‘지금여기’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제시하는 개념어가 품고 있는 생성의 힘이다. 넓고 깊은 공감은 그 다음이다. 위험을 무릅쓰지 않은 사유의 운동은 헛돌음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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