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봄호: 건축의 힘은 무엇인가

건축평단 2016 봄호
2016년 3월 5일 발간
정예씨출판사

여는 글 – 봄 2016

건축의 힘
힘이 없는 모든 것은 휩쓸려간다 _ 송종열
건축의 힘 _ 임성훈
일상 삶에 미치는 건축의 윤리적 힘 _ 이경창
건축은 살아있다 _ 이동언
현실참여와 건축의 힘 _ 임기택
순정(純正)한 건축 _ 이종건
아도르노의  미학이론을 중심으로 본 건축의 힘에 대한 소고 _ 박성용
페터 춤토르의 분위기, 그리고 일상 생활에서 건축의 힘 _ 백승한
건축의 힘 _ 유걸
건축의 힘: 色∧空 _ 박길룡
드로잉의 힘 _ 이관직
환상의 건축 _ 박천강

전통(건축)의 해석과 고유성
동아시아 건축미학을 향하여 _ 김경수
대담: 건축의 한국성 _ 김경수 & 신건수
전통 해석: 번역과 혼성성 _ 송종열

공간열기 생산적 독해
공간열기 생산적 독해 _ 이종건
空間列記의 열기 _ 이동언
늦게 읽은 김인철의 공간열기 _ 이경창

연재
김인성의 낭만비평 _ DDP와 바로크, 두 번째
조순익의 매개서평 _ 다양하게 보기와 삐딱하게 보기

 

 

여는 글 – 봄 2016

<건축평단>이 맞는 두 번째 봄이다. 봄을 어려움 없이 또 맞으리라는 생각은 꿈도 꾸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한 해를 뚫고 지나가자’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이 두 번째 ‘봄 호’를 내면서, 다음 봄은 이번 봄과 달리 분명히 맞이할 것이라는 기분이 든다. 따져 물으면, 근거를 딱 댈 수 없어 얼버무려야 할 판이지만, 살아가는 삶이 그렇듯, 존재의 지속을 가능케 하는 것은 우리의 계산을 넘는 일이니, 그리고 믿음이란 믿는 행위로써 세워가는 비이성적인 선취의 일이니, 따져 묻는 일에 그리 연연할 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하는 친구들이 늘어가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어서, 이러한 기분은 그저 드는 것이 아니라는 말은 적어도 할 수 있겠다. 그래서 이제는 희망을 넌지시 이야기해도 크게 손사래 칠 일은 아닌 듯싶다.

한국작가회의(민족문학작가회의의 전신)는 ‘작가들이 사랑한 2015년 올해의 책’으로 <시의 힘>을 선정했다. 신자유시대를 맞아 모든 게 ‘돈’으로 환치되는 자본주의 시대에 ‘돈’ 안 되는 문학이 왜 이 시대에 필요한지, 그 책이 역설한다고 했다. 건축은 이 시대의 삶에 어떤 존재인가? 얼마나 필요하며 어떤 소용을 주는가? 혹은 어떤 존재이어야 마땅한가? 지난 한 해의 삶을 뭉뚱그려 나타내는 말로, 대학교수들은 혼용무도(昏庸無道, 어리석고 무능한 군주의 실정으로 나라 전체의 예법과 도의가 송두리째 무너져버린 상태)를, 젊은이들은 시저지탄(匙箸之歎, 수저계급론 세상을 한탄한다)을 선택했다. 삶과 무관한 건축은 이미 건축이 아닐 터, 봄 호는 ‘건축의 힘’을 화두로 삼아, 건축이 어떻게 인간적인 삶에 복무할 수 있을지 숙고한다.

봄 호의 주제가 결정되고 얼마 후 칠레 건축가 아라베나(Alejandro Aravena, 48)가 프리츠커상을 수상했는데, 놀랍게도 이 사건은 <평단>의 주제와 일치한다. 편집인이 보기에, 프리츠커상은 대충 두 개의 가치기준에 따르는데, 하나는 유럽의 가치로서 마르크시즘 혹은 사회주의로 포괄되는 ‘건축을 통한 휴머니티의 증진’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의 가치로서 부친살해의 전통에 따른 ‘새로운 건축영토 개척’이다. 이 둘을 결합한 제3의 길도 능히 가능하나, 한국 건축가들은 지금은 거의 모두, 셋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것 같다. 그들의 작업에는 휴머니즘도 아방가디즘(avant-gardism)도 찾아볼 수 없는데, 더 큰 문제는 그들이 심지어 ‘가치’와 씨름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번 주제가 무가치성에 빠져든 한국의 건축가들을 미약하게나마 흔들 수 있길, 그리하여 그들이 깨어나길 희망한다.

작년 <텐 이슈>라는 이름으로 열 번의 집담회를 진행했는데, 지난 겨울호 주제 ‘한국성’을 이어갈 의도로, “전통(건축)의 해석과 고유성”을 주제로 한 마지막 집담 원고들을 올린다. 건축사회에 20여 년 동안 자리를 비웠던 김경수(전 명지대 교수) 선생의 참여는 참으로 반갑고 소중하다. 오랜만에 접하는 글과 말 덕에, 그가 그간 어떤 지적 작업을 벌였는지 대충이나마 가늠해볼 수 있겠지만, 더 깊은 이해를 위해 신건수가 진행한 대담을 덧붙인다. 한국성이든 고유성이든 결국은 ‘지금여기’로 나타나야 하니 ‘번역’ 작업이 필요하다. 송종열은 거기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리고 몇 년 전에 펴냈으나 누구도 거론치 않았던 김인철의 <공간열기>에 대해 쓴 세 개의 원고를 올린다.

지난겨울 시작한 ‘김인성의 낭만비평’은 앞글에 이어서 다시 한 번 바로크의 눈으로 DDP를 읽어낸다. 그리하여 반짝이는 매끈한 금속성 외피의 유선형 볼륨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느끼는 불편함의 근거를 드러낸다. 필자의 말을 옮기면, 그것은 “이 시대 우리 건축가가 현실(의 혼돈)을 ‘함께함(togetherness)’이 아닌 ‘마주섬(confrontation)’”으로 대하기 때문이다. 여름에 시작한 ‘조순익의 매개서평’은 네 번째로 마리우스 리멜레/베른트 슈티글러의 <보는 눈의 여덟 가지 얼굴>을 대상으로 잡아, ‘보기’의 사태를 본격적으로 해명한다. 그리고서 “우리의 시각이 근본적으로 타자의 시각으로 이데올로기화되어 있”다는 전제로, “우리는 어디까지나 맹점에서 세상을 보고 있는” 까닭에 “세상을 제대로 보려면 삐딱하게 볼 필요가 있”다는 문장으로 글을 맺는다.

꽃이 피는 봄이다. 광주사태를 비롯한 춘투(春鬪)의 냄새가 아직 우리 영혼에 서성이지만 많은 사람들에게는 그 낱말조차 생소할 것이다. 언제부턴가 이 땅의 봄은 오는 둥 마는 둥 너무 짧다. 산 너머 조붓한 오솔길에 찾아온다는, 들 너머 뽀얀 논밭에도 온다는, 아지랑이 속삭이며 어차피 찾아오시는 고운 소님이라는 봄을, 하얀 새 옷 입고 분홍신 갈아 신고 곱게 단장하고 웃으며 반기려는 마음을 갖추기도 찾기도 어렵다. 이 땅에 사는 사람치고 힘겹지 않은 이 없겠지만, 비록 잠깐일지언정 이 봄에는 모든 독자님들의 마음에 노랑나비 한 마리 사붓 내려앉길 소망한다.

편집인 겸 편집주간 이종건